탐욕스런 자본가에 의해 만들어진 산타라는 족속 때문에,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계급에 속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계급에 속하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슬퍼할 것인가.
착한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준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은 착하다. 착하지 않은 아이란 애초부터 없다. 누구를 위한 '착한 아이'인가. 선물 따위 알량한 미끼로 순수한 아이들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산타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착한 아이여, 총을 들어라. 그리고 너의 방 창문을 두드리는 산타를 쏴라.
- 아수라장 정태룡의 프리토크 中 -
크리스마스 이브고 하니 크리스마스 특집 포스트입니다. 2005년의 크리스마스. 솔로로서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였지요. 일요일이 겹쳐버린 크리스마스는 일정이 없던 저에게 그냥 주말과 다를 것 없는 휴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된거 그냥 잠이나 푹 자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야, 지금 빨리 홈플러스로 나와!"
제가 국문과 출신은 아니지만 한때 국어과목의 학원강사까지 바라보던 몸이었기에 저 짧은 친구의 한마디는 전화세를 줄이기 위해 굉장히 함축되어있지만 상당히 많은 전제가 내포되어 있으며 문맥과 상황에 따른 관련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표층적인 발화만으로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고 상황을 고려하여 봤을 때 저 전화의 의미는
"크리스마스에 여자친구도 없이 방구석에서 궁상떨지 말고 빨랑 나와. 우리가 놀아줄께."
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청자는 그런 의미를 쉽사리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지요.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남자 9명이 모여서 뭘하자는 걸까. …라고 해도 어차피 할 것도 없어서 약속장소로 나갔습니다.
넵, 9명. 그 당시 저희 모임 멤버들은 전부 솔로였습니다. 친구들과 합류하여 뭘 하려고 하냐고 물어보니 다같이 공터에서 양푼에 비빔밥을 비벼먹는답니다. 아니, 크리스마스에 비빔밥이라니.
마치 크리스마스에 족발을 먹는 듯한 부조화
"야이 쌉새들아. 비빔밥 먹자고 날 부른거냐?"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발상에 투덜거리고 있으니 친구 한명이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걱정마. 산타도 태울거야."
산타를 태운다! 전국 수백만의 솔로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처절함만 집어 넣고 있는 메리 크리스마스의 원흉인 산타클로스. 그렇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놀기 위함이 나니라 그를 처치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의 목적이 생기자 비참한 솔로들의 모임이 아닌 마왕을 무찌르는 용사의 파티가 되었습니다. 홈플러스에서 양푼을 사고 나물을 사고 참기름을 사고 고추장을 사고 이제 마지막으로 산타 인형을 사려고 하는데… 산타 인형이 조홀라 비싸네요.
양말에 매달린 산타
역시 이 자본주의의 개. 그래서 여자친구도 없는데 돈까지 없던 우리는 결국 현실과 타협하여 산타가 붙어있는 크리스마스 전용 벽걸이 양말을 샀습니다(…).
마땅한 공터를 발견하지 못하여 학교 운동장으로 위치를 변경하였지만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기름도 1리터 정도 샀으니 모든 준비는 갖추어졌습니다. 하지만 선조들께서 말씀하시기를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지요. 그래서 일단 양푼에 밥을 비벼 먹었습니다.
*실물은 사진보다 클 수 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하얀 눈이 내린 운동장에서 먹느라 경장적으로 추웠지만 위생장갑 하나 끼고 다같이 둘러 앉아 손으로 먹는 맛은 꽤나 각별했습니다. 김장 담그는 느낌도 나고~_~
초라한 산타의 최후
그리고 남은 양푼은 산타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가난한 저희들로서는 특별 화형 무대 따위를 만들어 줄 능력이 없었으니까요. 제 17번 양푼에 산타 1기 반응 확인. 지옥의 화염!
♣블랙크리스마스
- 마사루作(멋지다 마사루 중 발췌)
푹! 푹!
으아악...
마을은 순간
피로 물들고...
결국 산타는 그렇게 재가 되었습니다. 이걸로 마왕 산타는 죽어버렸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되도 전혀 슬프고 외롭지 않아! …는 훼이크고 산타를 태워봤자 외롭지 않다거나 슬프지 않을리가 없었지요. 그저 상징적인 행위일 뿐이니까요. 실제로 비빔밥도 맛있게 먹고 산타도 즐겁게 태웠지만 태우고 바로 슬픔을 감싸기 위해 술먹으러 갔습니다(…). 뭐, 저 이후로는 커플이 되버려 크리스마스에 친구들끼리 모여 산타를 태우는 저런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게 되버렸네요. 그렇다고 그 이후로 산타를 안태운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괜히 애꿎은 산타 태우지 말고 커플이고 솔로고 가릴 것 없이 모두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내 아이가 산타가 있냐고 물어보면
"옛날엔 있었는데, 아빠가 젊었을 때 잡아 없앴어."
라고 말해야지.